금융위원회는 올해 업무보고에서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금산분리는 말 그대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은행법 개정을 통해 제도화가 시작됐다. 금융기업의 사금고화를 막고 산업자본의 시장지배력 남용, 금융시스템 위험의 발생과 전이를 방지하자는 취지다. 금산분리 규제는 크게 소유와 진입, 그리고 행위와 업무 범위로 구분해 시행된다. 비금융주력자, 즉 산업자본은 은행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4% 초과하여 보유할 수 없다. 반대로 은행과 보험회사도 각각 비금융회사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15% 초과해 가질 수 없다. 금융지주회사도 마찬가지다. 업무와 관련해서는 은행법에 따라 은행 업무에 부수하는 범위 내에서 은행의 비금융 업무를 허용한다. 은행이 자회사로 둘 수 있는 업종은 은행업 감독규정에 열거된 15개 금융 관련 분야로 한정되고 열거되어 있지 않은 사업을 하려고 할 때는 금융위에 신고해야 한다. 사실상 허가를 받으라는 얘기다. 이른바 혁신 금융서비스로 지정되는 경우도 사업이 가능하다.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알뜰폰 사업과 배달앱 서비스에 진출한 것이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된 사례다.

  금산분리 원칙은 우리 금융산업의 핵심적인 규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금산분리'(金産分離,금융과 산업의 분리)라기 보다는 '은산분리'(銀産分離, 은행과 산업의 분리)로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규제의 강도를 나타내는 산업자본의 은행 보유주식 한도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친기업을 표방하던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9%로 늘었다가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던 박근혜 정부 초기에 다시 4%로 줄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은행의 비금융회사 지배와 비금융회사의 은행 지배는 은행법에서 금지하고 있고 보험회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들은 개별법에 따라 규제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원칙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엄격한 금산분리가 세계적 추세인 건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금산분리를 아예 법으로 제한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정거래법에서 일반지주회사는 금융회사를 자회사로 둘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고 금융지주회사도 일반회사를 자회사로 둘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보면 은행업과 산업을 겸업하는 나라도 있고, 엄격히 구분하는 나라도 있다. 산업자본의 은행소유를 완전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나라는 칠레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도라고 한다. 반면에 유럽이나 일본은 산업자본의 은행소유에 아무 제한이 없다. 미국도 5%까지는 완전히 허용하고, 5% 이상부터 25%까지는 미국 연준이 허용 여부를 판단한다.

  은행업과 산업이 분리된 역사적 배경도 은행업과 산업의 결합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시장개입 때문이었다. 은행업과 산업을 분리하는 관행의 기원은 1694년 영국의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이다.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자금조달이 급했던 영국 왕실은 잉글랜드 은행을 인가해주면서 정부에 자금을 공급하는 대가로 은행권 발행과 상업업무에 대한 특혜를 부여했다. 그러자 정부의 특혜 남용으로 피해를 보게 된 상인들이 반발했고, 정부는 상인들의 반발을 가라앉히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의 상업업무를 금지하게 됐다. 그러니까 은산분리의 규제가 시작된 배경은 정부와 은행 간의 특수 관계로 인해 생길 폐해를 우려한 것이었다. 물론 역사적 배경이나 다른 나라의 사례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특별히 금산분리에 민감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있는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가 문제다. 많은 재벌기업에서 총수들은 얼마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지고도 순환출자 같은 편법을 통해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은행은 예금자 보호를 포함해 정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공적 보조와 안전망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은행마저 재벌기업이 소유할 수 있다면 자칫하면 은행의 고객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 국가 경제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금융기관이 대규모 기업집단의 사금고가 되거나, 산업자본의 위험이 금융산업으로 전이되면서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그 피해가 전가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규제든 경제적 비용과 편익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고 현실에도 적합해야 한다.

  지금 다시 이 같은 논의가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시대의 변화 때문이다. 금융과 비금융 분야가 상호 접근하고 융합하면서 금융과 비금융 간 경계가 흐려지는 '빅 블러'(big blur)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산업자본이 은행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터넷 전문은행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인터넷전문은행은 산업자본이 은행 지분을 34%까지 가질 수 있다. 금융상품 거래가 디지털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상자산 같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상품이 출현하면서 금융업의 사업 모델과 영업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산업간 경계가 모호한 디지털융합의 시대에 지나친 칸막이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흔히 말하는 핀테크(FinTech)는 그야말로 산업자본이지만 금융과 기술을 분리하면 융합이 될 수 없다. 게다가 대기업의 자본력은 이미 은행을 능가한다. 지금도 자금 사정이 어려운 일부 기업들을 제외하면 주요 재벌기업들은 가능하면 자기신용에 근거해 회사채 발행 같은 직접 금융시장을 이용해 자금을 조달한다. 은행의 전체 기업대출 가운데 대기업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년 전에는 25%였지만 지금은 15% 수준이다. 금산분리에 대한 논의가 정치적 폭발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도 맞다. 과거의 저축은행 사태도 대주주의 불법 대출 등 기업주의 사금고화 문제가 불거진 사례였다. 그러나 달라진 금융생태계의 현실에 금산분리의 원칙이 아직도 적절한지는 검토하는 것이 옳다.

  금산분리는 한편으로 금융시장 경쟁을 제한해 금융의 역할을 축소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산업자본을 금융산업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경쟁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금융만 해도 자금력이 풍부한 국내 산업자본을 배제한 채 인수 주체를 찾다 보니 그동안 매각이 여의치 않았다. 사실 금산분리 규제에 관한 논쟁은 미국에서는 이미 100년을 넘겼고 국내에서도 이미 수십 년 동안 찬반양론이 대립하고 있다. 오랫동안 논란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금산분리의 경제적 효용성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결과는 없다. 금융산업의 경제적 효용성을 생각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금융시스템의 독립성일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과 루이지 징갈레스(Luigi Zingales) 교수는 ‘시장경제의 미래(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라는 저서에서 자본주의가 온전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금융시스템이 기득권층으로부터 독립돼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흔히 가족이 경영하는 은행의 비중이 높을수록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부실대출 비중이 늘어나고, 위기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부작용이 발생하는 이유는 대개 기득권층에 의한 금융시스템 포섭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금융시스템장악과 이를 통한 경쟁자들의 시장 진입이 문제라는 것이다. 재벌이 은행을 소유할 때의 문제점도 총수 일가의 이른바 ‘황제 경영’이라는 기업집단 지배 방식이 은행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요점은 은행을 포함한 금융산업도 더 치열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을 포함해 금융산업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지배구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배구조를 개혁하는 데도 금산분리 규제는 장애가 되고 있다. 현재 국내 주요 시중은행은 국민연금공단을 제외하면 외국계 자본이 대주주다. 국내 4대 금융지주의 외국인 지분율을 보면 KB 73.99%, 하나 71.73%, 신한 64.46% 우리 40.51%로 압도적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지분이 많아지면서 은행 경영의 목적도 수익성 제고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추세가 됐다. 확실한 지배주주가 없는 은행에서 경영진이 주주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기준은 영업이익과 배당이 될 수밖에 없고 경영진의 단기 이익추구라는 부작용도 불가피하다. 그동안 논란을 일으켰던 금융상품의 불완전판매는 산업자본의 금융기관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발생했다. 그렇게 보면 적절한 대처방안은 금산분리 규제가 아니라 해당 행위에 대한 치밀한 감시와 강력한 처벌이다. 금융회사 경영진의 책임 강화를 위한 제도는 더욱 엄격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역할과 책임은 일치해야 한다. 지배주주가 없는 은행을 금융당국이 흔드는 것도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흔히 우리나라에는 삼성전자도 있고 현대자동차도 있지만,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은행이나 금융회사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금융당국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나친 규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치열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환경이다. 금산분리의 원칙이 금융산업의 경쟁 촉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소유지배에 대한 규제는 필요하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규제나 감독을 완화해서 취약한 금융소비자 보호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금산분리의 원칙도 경제발전단계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금산분리의 문을 여는 것이 반드시 규율의 완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내 금융자본의 부재, 기업들의 적대적 M&A 가능성, 규제의 실효성 등을 고려하면 산업자본을 금융산업 발전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는 은행업 진출 문턱이 낮아져도 까다로운 규제와 감시를 의식해 산업자본의 은행업 진출은 예상만큼 활발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의 금산분리 완화는 산업자본의 금융진출 확대 보다는 금융자본의 비금융사업 진출에 초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는 현재 은행의 비금융 자회사에 대한 지분투자 한도 15%를 높이고 자기자본 1% 이내의 투자는 업종제한 없이 허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굳이 세계적인 추세를 따지지 않더라도 다른 많은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